유럽의 중심에서 차세대 한국 전문가를 육성하는
베를린자유대학교 한국학과 이은정 교수
베를린자유대학교 한국학과는 올해부터 현지 운영기관으로서 베를린 세종학당을 운영하게 됐습니다. 베를린 세종학당을 비롯해 베를린자유대학 동아시아대학원 설립을 주도하고, 한국학의 불모지였던 독일에서 한국에
대해 교육하고 연구하며 수많은 학생을 배출해 온 이은정 교수를 만났습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은 독일 괴팅겐대학에서 정치사상사로 박사 학위를 받으시고, 2008년 베를린자유대학 한국학과 정교수로 초빙된 이후 독일어권 내 한국학 연구에
앞장서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에 관심이 많은 전 세계 세종학당 관계자에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베를린자유대학교 한국학과 교수 이은정입니다. 1984년 독일이 분단되었던 시기에 서독으로 유학 가서 괴팅겐대학에서 공부하고, 독일이 통일된 이후 할레대학교에서 교수 자격을 받았습니다.
2008년에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있는 자유대학교에서 신설한 한국학과의 교수로 부임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학의 불모지라고 할 수 있는 독일에서 한국에 대해 교육하고 연구 활동을 하면서 독일 사회에
한국을 심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베를린자유대학 한국학과에 대해서도 소개 부탁드립니다.
베를린자유대학교 한국학과는 ‘한국학연구소’라고 불립니다. 독일어 공식 명칭이 한국학연구소이기 때문입니다. 한국학과의 재학생은 학부와 대학원을 합해서 약 300명 정도 됩니다. 이 숫자는 지난 10년
동안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한국학과의 교육 목표는 학생들에게 한국의 전통과 현대, 남한과 북한을 모두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학부의 커리큘럼도 그에 맞춰서 짜였습니다. 이
점이 저희 학과가 유럽의 다른 대학에 있는 한국학과와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를린자유대학교 한국학과 커리큘럼의 특이점은 체계적인 한국학연구방법론 훈련을 통해 학생들이 분과학문으로서 한국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입니다. 한국학연구방법론 수업은 학부 1학년 1학기 때
시작해서 졸업할 때까지 여러 학기에 걸쳐 이루어집니다. 한국학과 학생들은 학부 1학년 때 한국학방법론을 비롯해서 한국문화, 역사, 정치입문 수업을 듣고 2학년 때 한국행정과 국제정치, 북한에 관한
수업을 필수로 공부하며 세미나를 통해 선별된 주제를 분석하는 연습을 하게 됩니다. 2학년을 마친 학생 중에서 한국에 있는 대학에서 공부하기를 원하는 학생은 모두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갑니다. 그리고
나머지 1년 동안은 심화 세미나를 통해 다양한 연구 분야를 배우게 됩니다.
한국어 수업은 한국학 연구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도구를 배우는 과정입니다. 저희 학생들은 한국학을 전공하는 동안 한 학기도 빠지지 않고 일상적인 한국어부터 학문적 연구를 할 수 있는 고급한국어까지
한국어 수업을 필수과목으로 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한국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하기 때문에 저희 학과에서 한국학을 전공한 학생들의 한국어 실력이 아주 좋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하지만 언어는 수단일 뿐
그것 자체가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저희 학생들은 한국학 학사와 석사를 취득한 후 다양한 분야에 취업해 왔습니다. 한국과 관련된 일을 하는 회사에 취업한 졸업생들이 가장 많고, 독일 정부나 공공기관에서 일하고 있는 졸업생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독일 대학에는 졸업생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이 없어서 개인적으로 졸업생들의 소식을 들을 뿐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왼쪽부터) 베를린자유대학교 한국학과(한국학연구소)의 봄, 겨울 풍경
2012년, 교수님의 주도로 베를린자유대학 동아시아대학원(GEAS: Graduate School of East Asian Studies) 설립이 이루어졌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후 지난 10년 동안
많은 연구와 함께 다양한 인재를 배출해 오셨는데요. 이 기간에 가장 기억에 남는 연구나 성과가 있다면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독일인들은 최근까지도 동아시아를 일본, 중국과 동일시해 왔습니다. 한국에 대해서는 중국의 변방 또는 일본의 변방 정도로 생각해 왔어요. 한국, 일본, 중국 세 나라를 동등한 비중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2012년 베를린자유대학교에 동아시아대학원을 만들 때 함께 일하는 독일인 교수들에게 기존의 사고에서 벗어나 동아시아 삼국을 동등한 비중으로 교육·연구하는
기관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동아시아대학원에서 박사 과정 학생을 선발할 때도 한국, 일본, 중국을 전공하는 학생의 비율을 동일하게 했습니다.
지금은 동아시아대학원과 한국학연구소를 통해 배출된 박사들이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쓴 박사논문의 연구주제는 한국의 정치문화, 정치담론, 정당제도, 노동시장, 북한인권, 정치사상,
그리고 현대사회와 문화 등 다양합니다. 주임교수가 한 명뿐인 동아시아대학원 한국학과에서 이렇게 다양한 주제로 논문을 작성할 수 있는 이유는 멘토팀을 구성해 지도하는 시스템을 도입했기 때문입니다.
멘토팀으로 구성된 지역학과 분과학문의 전공 교수들이 함께 논문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동아시아대학원 박사 과정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학제 간 연구에 익숙하게 됩니다.
한국학연구소에서는 다양한 연구프로젝트들도 직접 진행하고 있습니다. 베를린에서 이루어지는 학제 간 연구프로젝트에도 참여합니다. 최근에 진행한 연구프로젝트는 ‘동아시아의 서원’에 관한 연구와 ‘문화사적으로
접근하는 한류’에 관한 것입니다. 조선의 서원에 관한 연구를 필두로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존재했던 서원에 관해 조사·분석한 저희 팀의 연구성과는 국제적으로도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한류에 관한 연구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여서 연구성과가 나오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 외에도 한국학연구소에서는 독일통일의 경험이 한반도에 주는 시사점을 찾기 위한 연구를 오랫동안 진행하고
있습니다.
통일부가 주최하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북한대학원대학교, 베를린자유대학 한국학연구소가 공동으로 주관한
‘2018 한반도 국제포럼(KGF)’의 모습
독일 내 한국학 인기와 성장 비결에 ‘한류 열풍’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하시나요? 한국학과에서 가르치시면서 체감하시는 독일 사회 내 변화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독일에 한류 붐이 시작된 것은 2020년 코로나19 시기의 전후이고, 한국학과의 학생 수가 급증한 것은 2010년부터 2014년 사이입니다. 그 후에는 정원제를 도입해서 1년에 전공생은 한 학년당
53명만 입학시키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신입생 중에 한국어를 공부해 경험이 있는 학생이 한두 명 있었던 데 반해 2020년대에 들어서는 신입생 중에서 한국어를 전혀 공부해보지 않은 학생이 53명 중에서
한두 명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변화가 독일 사회에서 한국을 보는 시각이 변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척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 학과에 입학한 학생들은 독일에 한류가 시작하기 훨씬 이전에 한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친구들인 것이지요.
베를린자유대학 한국학과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끌어 오시면서 가장 큰 도전과제는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이를 어떻게 극복하셨는지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베를린자유대학교 한국학과의 정교수로 부임한 이후 제가 부딪힌 가장 큰 과제는 한국에 대해 무지한 독일 사회에 한국을 심는 것이었습니다. 독일인들에게 한국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지도를 펼쳐서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줘야 할 정도였지요. 2016년, 베를린 학술원에서는 300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비유럽권 출신 학자인 저를 정회원으로 선출했습니다. 저를 독일인들에게 소개하는 기념식에서 학술원장이
한국학이라는 학문도 있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독일인들은 한국을 모르고 있습니다. 저희 학과에서 한국학을 전공하는 학생 300명은 아주 예외적인 독일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저는 독일 청소년들에게 한국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중고등학교에서 한국에 관한 수업을 할 수 있도록 중고등학교 교사들을 위한 한국학 워크숍을 10년 동안 진행했습니다. 한
분의 선생님이 100명 이상의 청소년들에게 한국과 관련된 주제를 교육할수 있기 때문에 먼저 선생님들에게 한국을 인식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입니다.
매년 스물다섯 명 정도의 독일인 교사를 베를린으로 초대해서 3박 4일 동안 한국에 관한 다양한 주제를 소개하고 그것을 어떻게 수업에 활용할 수 있을지 함께 토론했습니다. 그런 노력의 결과 독일 대학
입학 자격을 위한 아비투어(Abitur) 시험문제로 한국과 관련된 주제를 출제한 학교도 생겼습니다. 청소년 시기부터 한국에 관해 배우고 한국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사람들이 많아지면 그만큼 독일에도
지한파가 늘어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올해부터 베를린자유대학교는 현지 운영기관으로서 베를린 세종학당을 운영하게 됐습니다. 세종학당 운영을 결심하신 이유와 베를린 세종학당을 통해 이루고 싶으신 목표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베를린 세종학당을 운영하기로 한 이유는 베를린의 청소년들에게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베를린 세종학당을 통해 한국어가 제2외국어로서 베를린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것이 저희의 목표입니다. 나아가 대학 내에서 진행하는 세종학당의 특성을 살려 한국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도울 수 있는 문화프로그램을 많이 제공하려고 합니다.
(왼쪽부터) 베를린자유대학교 한국학과 건물 전경, 강의실 모습
최근 유럽 내 한국학과 한국어교육의 전망에 대해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평가하고 계신가요? 더불어 한국어와 한국문화 보급에 가교역할을 하고 있는 세종학당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제언 부탁드립니다.
근래에 독일 언론에서 한국에 관한 보도가 늘고 일반시민들의 한국에 관한 관심도 높아진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 분위기가 한 때의 유행에 머물지 않고 지속적이고 심도 있는 한국에 대한 이해로 발전하게
만들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한국학과 한국어교육이 앞으로 담당해야 할 과제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한국을 알리는 차원을 넘어서 한국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일방적으로 “한국적인 것”을 홍보하는 것은 더이상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앞으로 이와 관련해 함께 토론하고 고민할 수 있는 자리가 베를린 세종학당에 많이 마련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차세대 한국학 연구자들과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관심이 많은 전 세계 예비 세종학당 학습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차세대 한국학 연구자들이 한국학의 연구를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올려놓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문화에 담긴 고유한 미학과 한국인의 고유한 사유 세계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논의되고 그것이
한국학의 경계를 넘어 학계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담론으로 발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국과 한국어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이 더 많아진다면 이런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날이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올 수 있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우려는 예비 세종학당
학습자들과 한국을 이해하려는 지식공동체의 일원이 된 세종학당 학습자들 모두에게 감사하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