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콘텐츠와 한국어의 확장성
경희대학교 K컬처·스토리콘텐츠연구소 안숭범 소장
전 세계 문화산업의 중심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자랑하며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K-컬처는 반짝 유행하는 트렌드를 넘어 어느새 하나의 글로벌 문화 코드로 자리 잡았습니다. 한국어 학습 수요를 이끄는 가장
큰 원동력으로 꼽히며 한국어 확산과 불가분의 관계인 한국문화. K-콘텐츠의 현재와 미래를 연구하는 경희대 K-컬처·스토리콘텐츠연구소 안숭범 소장을 만나 K-컬처의 글로벌 위상과 전망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안녕하세요? 안숭범 소장님. 먼저, 소장님과 K-컬처·스토리콘텐츠연구소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대학 부설 K-컬처·스토리콘텐츠연구소를 책임지고 있는 안숭범입니다. 최근 저는 한류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을 한국학에 대한 관심으로 수렴해 가기 위해
다양한 연구 및 교육 활동을 하고 있답니다. ❬월간똑똑❭ 독자들에게 인사드리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대학원에서 ‘문화콘텐츠학’을 전공했는데 한국 대중문화의 해외 수용에 관심을 가지며 비교문화학적인 연구를 해왔습니다. 특히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 대부분의 문화콘텐츠가 ‘스토리’를 핵심
질료로 삼는다는 데 착안해 서사학 기반 ‘스토리텔링’을 공부했습니다. 시인과 영화평론가로 등단해 활동하는 덕분에 다양한 성격의 지면을 통해 독자를 만나고 있기도 합니다. 과거에 EBS ❬시네마
천국❭ 진행자로 활동하기도 했고, 부산국제영화제 등 여러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습니다.
현재 제가 이끌고 있는 K-컬처·스토리콘텐츠연구소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발주한 K학술확산연구소사업에 선정되어 해외에 한국학을 소개하고 확산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매년 한국어, 한국문학,
한국문화에 관한 10개 온라인 강좌(5년간 50개 강좌)를 개발해 해외 한국학 관련 기관과 대학이 활용할 수 있도록 알리고 있지요. 대학 자체적으로 ‘Kyung Hee Global Virtual
School’이란 이름의 온라인 강좌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기도 합니다. 최근 1년 반 사이, 5학기를 운영하는 동안 누적 숫자로는 136개국, 720개 대학, 10,141명이 제 연구소가
개발한 한국학 강좌들을 수강했습니다. 이 강좌들은 한국의 K-MOOC을 포함해 중국의 쉬에탕X(XuetangX)에서도 일부 운영되고 있습니다.
K-컬처, K-콘텐츠, 그리고 한류라는 용어가 자주 혼용되어 사용되곤 합니다. 소장님께서는 이 세 가지 개념을 각각 어떻게 정의하고 구분하시며, 특히 K-컬처와 K-콘텐츠가 한류의 확산 과정에 어떤
역할을 한다고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먼저 한류의 일반적인 정의는 한국의 문화가 해외에서 인기를 끌며 소비되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세계인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한국의 문화 콘텐츠들, 그리고 그와 유관한 분야의 상업적 콘텐츠가 한류를
선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K-컬처와 K-콘텐츠 개념을 정의하면서 한류의 확산에 어떤 의미를 갖고 서로 연관되는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K-컬처는 한류 현상의 결과로 세계인의 의식과 감정 속에 새겨진 ‘한국문화’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K-컬처는 한국문화 그 자체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한국문화란 한국인의 고유한 전통과 현대적
생활 방식을 포괄하며 매우 넓은 의미망을 갖습니다. 한국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의식적 유산과 현실적 결과물들이 각각 한국문화의 내포와 외연일 수 있습니다. 이와 비교하면,
K-컬처는 글로벌 맥락에서 화제성을 낳고 소비되고 있는 동시대 문화 콘텐츠들을 중심으로 나온 개념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글로벌 소비자들은 각자의 취향과 관습에 따라 한국문화의 특정 이미지를 탈의미화, 재의미화하는 주체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한국 문화콘텐츠들을 통해 이해한 ‘한국’, ‘한국인’, ‘한국적인
것’은, 우리의 생각과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한국문화는 우리가 가장 잘 알지만, K-컬처는 우리가 가장 잘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K-콘텐츠는 한류를 견인해 온 영화, 드라마, 음악, 웹툰, 게임과 같은 대표적인 문화콘텐츠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한류가 30여 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K-콘텐츠로 지칭될 수 있는 콘텐츠 분야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해외 한류 팬들을 대상으로 조사해 보면, ‘한국’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으로 K-팝, K-드라마와 함께 한식과 뷰티, 패션 등이 거론되곤 합니다.
K-콘텐츠를 좁게 보고 미디어를 통해 유통되는 창의적 산물로 규정한다면 K-푸드, K-뷰티, K-패션에 속하는 상품들은 때때로 K-콘텐츠라고 말하기 애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류는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폭넓게 확장됐습니다. 따라서 광의의 의미에서는 미국 대형 마트에서 팔리는 비빔밥도, 울타뷰티에서 팔리는 한국 화장품도 모두 K-콘텐츠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K-푸드, K-뷰티, K-패션 역시 용어를 쓴 지 오래된 만큼 각각 경제적 가치를 지니면서 브랜드화되고 있는 K-콘텐츠라 할 수 있습니다.
런던 뉴몰든 테스코 매장에서 한국 식품을 살펴보고 있는 영국 시민들 (사진=연합뉴스)
K-콘텐츠는 이제 단순한 문화콘텐츠를 넘어 세계인의 일상과 소비를 변화시키는 생활 문화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왜 세계는 K-콘텐츠에 열광하는지? K-콘텐츠 산업의 성공 요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K-콘텐츠 산업의 성공 요인을 비즈니스 환경 분석 프레임인 5Cs 요소(고객 Customer, 회사 Company, 경쟁 Competition, 협력자 Collaborators, 환경적
요인Context)에 따라 설명해보겠습니다.
먼저 K-콘텐츠는 세계인의 보편성과 다양성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키며 그들을 고객으로 만들어 왔습니다. 대다수의 K-콘텐츠는 ‘한국적인 것’, 곧 지역적 개성과 특수한 양식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글로벌 고객이 보편적으로 관심을 가질 만한 이슈를 다루고, 그들이 공감할만한 장르를 활용하며, 그들이 가장 즐겨 찾는 플랫폼에 최적화된 방식으로 확산해 왔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콘텐츠 주
소비층(지금은 밀레니얼 세대, Z세대)의 트렌드를 주도하면서 그들의 감정에 호소하는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인종, 국가, 젠더, 계급, 종교 등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도 충분한 고려가 이뤄지는 가운데 K-콘텐츠가 탄생하고 있습니다.
둘째, K-콘텐츠 기업들은 각자가 해낼 수 있는 디지털 혁신을 통해 콘텐츠 소비 방식의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며, 플랫폼 패권주의에 맞서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K-콘텐츠 기업들은 압도적인
영향력을 갖는 글로벌 플랫폼, 곧 콘텐츠 창구를 장악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는 K-콘텐츠가 유튜브, 틱톡,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왓츠앱, 넷플릭스, 아마존 프라임, 디즈니+, 스포티파이, 애플뮤직,
아마존뮤직과 같은 압도적인 플랫폼에 의존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의 K-콘텐츠 기업들은 저마다의 아이디어로 K-컬처 팬들과의 접촉면을 넓히고 있습니다. 팬 커뮤니티와 이커머스를 혁신적으로
결합한 위버스 사례를 보면, ‘연결’과 ‘공유’, ‘창조적 연대’를 끌어내는 흥미로운 창구로 기능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K-콘텐츠는 내부적으로 매우 치열한 경쟁을 통해 퀄리티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포스트 BTS 시대, 포스트 블랙핑크 시대에도 K-팝이 끄떡없는 이유는 수많은 보이그룹, 걸그룹들이 국내외 K-팝
팬들의 트렌드와 소비자 니즈를 선도적으로 반영하며 경쟁하기 때문입니다. 그 덕분에 K-콘텐츠는 해외 시장에서 제작비에 비해 확실히 높은 퀄리티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넷플릭스 역사상 여전히
최고 흥행작에 위치한 ❬오징어 게임❭의 투자 대비 효율은 41배였다는 발표가 있습니다.
넷째, K-콘텐츠는 한류에 관한 정부의 지원과 압도적인 활동력을 보여주는 팬 커뮤니티, 그리고 혁신적인 사업 모델을 끊임없이 갱신해온 K-콘텐츠 기업의 유기적인 협력 속에 발전되어 왔습니다. 이미
브랜드화된 K-콘텐츠의 영향력을 활용하려는 글로벌 플랫폼 기업들도 협력의 주체일 수 있습니다.
다섯째, 30여 년간 한류가 지속된 데에는 다양한 환경적 요인이 뒷받침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한국 정부나 기업, 아티스트들의 노력이 중요한 요인이라 할 수 있지만, 김대중 정부 때부터
국가의 성장동력으로 발전시켜 온 IT 기술과 꾸준하게 내실을 다져온 콘텐츠 산업 생태계 역시 한류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아시아 전역에서 미국 중심 서구 대중문화가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고정관념에 균열을 일으켰지요. 최근 코로나19 팬데믹 역시 K-콘텐츠가 확산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세계인의 평균적인 생활 속에서 스크린 타임이 늘면서, K-콘텐츠는 더 폭넓게 유통될
수 있었습니다.
(왼쪽 사진) 지난 12월 16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BFI 사우스뱅크 극장에서 열린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시즌2 시사회 (사진=연합뉴스)
(오른쪽 사진) 2023년 12월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개장한 ‘오징어 게임’ 체험 공간에서 구슬 게임을 하고 있는
참가자 (사진=연합뉴스)
최근 산업계를 보면 K-콘텐츠는 ‘한국’에서, ‘한국인’만 생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인에 의해 재해석되고 세계인과 함께 생산하는 현상을 쉽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콘텐츠 기획·생산·방식의 변화에
따라 K-콘텐츠의 글로벌 위상은 어떻게 달라지고 있나요?
가장 최근 사례로 이야기해 보면, 2023년 12월에 데뷔한 BUS(Because of You I Shine)라는 그룹은 태국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만든 12인조 보이그룹입니다. 11명이 태국인 멤버이고
1명이 한국인 멤버이지요. 이들은 명백히 K-팝을 표방하면서도 태국인의 정체성을 갖고 세계 무대에 진출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출현 배경에는 연예 산업 육성 부처를 신설한 태국 정부의 의지, 엔터테인먼트
기업들의 전략 등이 있습니다. 이처럼 K-팝은 ‘글로벌’을 표방하며 한국에서 출현했지만, 이제는 다양한 형태의 ‘글로컬’ 양식으로 분화해 가고 있습니다.
이렇듯 K-컬처의 잠재력은 새로운 차원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K-콘텐츠는 대중문화 선진국들의 장르, 양식, 트렌드를 가져와 ‘혼종화’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K-콘텐츠를
자국 문화의 특성에 맞게 ‘혼종화’하는 사례를 해외에서 목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변화를 통해 K-콘텐츠가 세계인의 일상에 더 깊이 안착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 앞으로 소장님이 예상하시는 미래 한류의 모습도 가능하다면 공유 부탁드립니다.
지금까지 한류는 크고 작은 부침을 겪어 왔습니다. 권역과 국가에 따라 통제 불가능한 이유로 위기가 확산된 적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한류는 확산을 거듭해 왔습니다. 저는 한류가 단기간 내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세계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밀착되어 창조적으로 굴절되고 연장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류는 새로운 분야로, 새로운 고객을 찾아, 새로운 양식을 발굴해 가며 확산될 것입니다. 이는 한류가 지금까지 생존해 온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한류는 천천히 서남쪽으로 전진해 가는 중입니다. 한류
초창기에는 일본을 포함해 중화권 국가가 한류의 최대 소비처였습니다. 이후 동남아시아로 그 열기가 퍼졌고, 지금도 그 분위기는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지표를 보면 인도와 사우디아라비아, UAE,
이집트 등으로 한류 확산세가 무섭습니다.
유념할 점이 있다면, 과도한 국가적 자긍심, 애국심에 기대어 우리가 한류의 우월적 발신자라는 사실에 취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류를 떠올릴 때, 국경 바깥에서 능동적으로 K-콘텐츠를 소비하는
이들이 진정한 주인공이란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들을 K-컬처의 발신자로 인식할 때, 우리는 책임 있는 수신자이자 호혜적이고 효율적인 재발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지난 10월 프랑스 파리 브롱냐르 궁전에서 열린 K-박람회에 입장하기 위해 줄을 선 파리 시민들 (사진=연합뉴스)
이런 흐름 속에서 한국어 학습 수요도 자연스럽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세종학당재단이 준비해야 할 점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저는 해외 한국(어)학 관련 강좌가 개설된 대학, 한국(어)학 관련 전공이나 학과가 운영 중인 대학들과 활발히 교류해 왔습니다. 베트남은 한국어 강좌나 한국학과가 존재하는 대학 숫자가 2017년
23곳에서 2023년에 60곳이 되었습니다. 베트남의 명문대인 하노이대학교의 2023~2024년 입시에서는 한국어학과가 전체 25개 학과 중 당당히 합격 점수 1위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태국에서는
한국어가 제1외국어로 지정되어 초등학교 1학년부터 선택 과목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인도 최고의 대학 중 하나인 자와할랄 네루대학교 한국학과는 2022년 입시에서 정원 30명인 학과에 10만여 명이
지원해 3,300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습니다. 정도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런 현상은 유럽과 미국의 여러 지역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세종학당재단의 역할과 영향력에 대해 고민해 왔는데요. 저는 세종학당재단이 한국어 학습에 대한 세계인의 열기를 한국 문학, 한국 역사, 한국 정치 등 ‘한국적인 모든 것’에 대한 관심으로
넓혀가는 데 가교 역할을 해줬으면 합니다. 이미 어느 정도 그 기능을 감당하고 있지만, 더 전략적·능동적으로 나서주시길 요청 드립니다. 또한 권역별·국가별로 한국(어)학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미시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예컨대 특정 국가에서는 자국에 진출해 있는 한국 대기업에 취업해 높은 소득을 기대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한국어 학습이 이뤄지고 있고 이에 따라 여러 유관 기관에서 간헐적으로
한국(어)학에 대한 수요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세종학당재단도 나서서 정기적으로, 더 체계적으로 그런 조사를 진행한다면 이를 통해 권역별 수요 맞춤형 한국어 수업 모델을 다양하게 개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항상 세종학당재단과 동행하는 마음으로 재단과 전 세계 세종학당의 앞날을 응원하겠습니다.